당수 팔단의 헛발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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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물류담당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1-16 09:52 조회3,194회본문
출처 :한겨레신문 메거진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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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이민혜 |
[매거진 esc] 성석제의 사이(間) 이야기
녹차로 유명한 중국 항저우에서 만난 사람 좋은 웃음의 농부…그에게서 산 ‘기막힌’ 용정차
망설이고 있을 때 농부는
손때가 탄 공책을 내밀었다
한글로 적은 극찬이 빼곡했다 21세기로 접어든 지 얼마 안 되던 5월 중순 어느날, 나는 용정 근처의 다관에 앉아 있었다. 항저우는 이미 한여름처럼 더웠는데 마침 비라도 올 듯 하늘이 잔뜩 흐려서 다닐 만은 했다. 편식의 거장으로 꼽히고 있던 나는 몇 가지 음식은 남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곤 했다. 그중 하나가 차였다. 차는 좋은 차와 나쁜 차, 비싼 차와 싼 차를 눈 감고도 쉽게 구별했다. 고풍스러운 다관에서 용정차를 마시면서 한국의 작설, 우전, 색과 향에 관해 동행인 친구에게 열변을 토하고 있던 중이었다. 묵은 소엽종 차나무처럼 키가 작고 뚱뚱한 농부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이 차를 직접 재배하는 사람인데 손수 잎을 따서 차를 만들었으니 집에 와서 맛을 보고 가라고 했다. 다관에 진열해두고 파는 차에 비하면 절반도 되지 않는 가격이고 집도 바로 근처에 있다, 차를 만드는 과정을 시연해 보일 수 있다고도 했다. 차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친구는 그의 말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나 또한 중국말을 몰랐다. 하지만 차밭이나 차를 만드는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어서 친구에게, 농부를 따라가려는데 혼자서는 바가지 쓸까봐 무서우니 같이 가 달라고 부탁했다. 바로 곁에 있다던 농부의 집은 길가에 드넓게 펼쳐진 차밭을 지나서 차밭 사이의 농로와 꼬불거리는 언덕길을 한참 올라가서야 나타났다. 이십 분 넘게 걸어가면서 농부는 한시도 쉬지 않고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자신이 가꾸는 차나무에 관해 이야기를 했고 나는 알아듣지도 못한 채 좋은 차의 기준이 뭔지에 대해 친구에게 통역하느라 애를 썼다. 농부의 집은 내가 나서 자란 고향 마을, 중농이 살던 집처럼 아담했고 마당에는 자그마한 닭들이 저보다 더 작은 병아리를 데리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농부의 아내도 아담하고 통통하면서 귀여운 인상이었다. 농부는 우리를 마당의 평상에 걸터앉게 한 뒤 뜨거운 물을 찻잎이 든 다기에 가득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찻물이 우러났다. 농부는 차를 잔에 따르더니 두 손을 하늘을 향해 쳐들면서 어서 마셔보라고 권했다. 친구는 마지못해 찻잔을 들었다가 잔 속에 찻잎이 너무 많아 마시기가 힘들다고 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고려 태조 왕건처럼 열심히 찻잎을 후후 불어가며 마셨다. 보기와 달리 아주 청신하고 고급스러운 맛이 났다. 농부의 아내는 다시 찻물을 따랐다. 두 번째로 우려낸 차는 더욱 맛이 좋았다. 여러 번 우려낼수록 맛이 옅어지는 법인데 그 차는 더 향기로워지는 것 같았다. “우리 차를 아홉 번 덖고 아홉 번 비벼서 말린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찻잎이 여려서 그렇게 많이 덖고 비비면 찻잎이 부서져 버리거든. 네댓 번이면 많이 덖는 거야. 이건 몇 번을 덖었는지 모르겠네.”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농부는 차를 덖고 비비는 도구가 있는 방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농부의 아내는 다기가 올려진 쟁반을 들고 뒤를 따라왔다. 농부는 실제로 차를 덖는 과정에 대해 짤막하고 통통한 손과 몸을 바쁘게 놀려가며 그 일이 얼마나 고단한 것인지를 설명했다. “차가 밥도 아닌데, 안 먹어도 될 걸 굳이 먹자니까 힘든 거지. 빨리 가자고. 아저씨, 이 차 얼마예요?” 친구가 묻자 농부는 우리가 마신 일반 차가 한 통(120그램)에 2만원쯤 한다 했다. 내가 찻값이 너무 비싸다고 반의 반값으로 후려치자 농부의 아내가 새로운 차를 내왔다. 그보다 상급인 차로 가격이 두 배쯤이라고. 확실히 맛의 차이가 났다. 그걸 또 절반으로 깎자 청명 전에 수확한 새 차(明前茶)가 나왔다. 마비되어가던 혀가 다시 깨어날 정도의 강력한 맛이었다. 내가 또 깎아야 하나 어쩌나 망설이고 있는데 결정타를 날리듯 농부는 손때가 탄 공책을 내밀었다. 그 안에는 거기를 다녀간 손님 수백명이 쓴 방명록이 적혀 있었는데 그중 절반은 한글로 돼 있었다. “용정차 맛 따봉! 돈 많이 버세요! 연남동 최고봉”, “정직한 농부의 맛있는 용정차, 진짜 최고예요! 광명 김대길” 하는 식으로. 가장 뛰어난 광고 수단은 신뢰가 가는 사람의 네트워크에 의해 전파되는 입소문이라던가. 외국에서 만난 한글로 된 찬사 때문에 팔랑귀가 된 나는 용정차를 세 통이나 사들고 농부의 집을 나왔다. 농부가 부른 값의 3분의 1 정도밖에 치르지 않았으므로 의기양양했다. 집에 와서 하급품부터 차를 개봉했다. 처음부터 그 맛이 아니었다. 두 번째, 세 번째도 이상했다. 심지어 먼지와 흙이 섞여 있었고 작은 나뭇가지가 들어 있기까지 했다. “어리바리한 게 당수 팔단(八段)이란 말도 못 들어봤냐.” 친구는 품평했다. 이런, 18과 18동인 이단옆차기 같은 일이!
성석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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